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예로부터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표현할 정도로 많은 사찰과 탑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남산 서록에 있는 창림사는 위치나 탑의 모습을 보면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 중에 하나였습니다.
창림사의 역사
창림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라 때 인물 김생(金生)이 창림사비를 쓴 것을 원나라의 조자앙이 찬양했다는 내용이 전해옵니다. 김생(金生)이 711년에 출생한 인물이며, 80이 넘게 살았으며, 그의 글씨는 명필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창림사도 8세기경에는 존재했던 사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후 폐사 내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삼국유사에서는 창림사터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궁실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라 첫 번째 궁궐터가 됩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기와나 초석이 사용되던 시기가 아니므로 궁궐터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경주 남산 창림사지 3층석탑(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 Three-story Stone Pagoda at Changnimsa Temple Site of Namsan Mountain, Gyeongju)
이 탑의 높이는 약 6.5m입니다. 기단부와 탑신부만 남아있고,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원래 부재가 산재하던 것을 1976년 신재를 일부 넣어 현재와 같이 복원했습니다. 그후 201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면석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조상했다는 것입니다. 또 1층 탑신석 각 면에 문비를 새겨 넣은 점도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 탑에서는 조선시대에 이미 사리공 속에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昌林寺 無垢淨塔願記)’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발견하고 추사 김정희가 모사해 두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문성왕 17년(855년)에 현세와 내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해 무구정탑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 창림사 무구정탑원기의 원본은 행방을 모르다가, 2011년 경기도 화성시의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국왕경웅조무구정탑원기’가 원본 동판임을 확인되어, 추사 김정희의 모사가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창림사지에는 창림사지 3층석탑 외에도 창림사 쌍귀부가 전해집니다. 신라 때의 귀부(龜趺)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두 마리가 같이 있는 쌍귀부라는 점은 더욱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림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창림사의 중요성으로 인해 2011년부터 최근인 2020년까지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현 창림사탑을 볼 때 전당후탑의 가람배치임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창림사탑 아래쪽의 넓은 대지에는 지금의 동서축이 아닌 남북축의 가람이 겹치는 것처럼 확인되어, 가람배치의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 창림사탑 외에도 아래에 동서쌍탑이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창림사지 주변 문화재
창림사지 역시 주변에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蘿井)과 신라 6부촌장의 위패를 모신 육부전, 남간사지 당간지주, 석정, 일성왕릉 등이 북쪽에 있고, 이곳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 포석정(鮑石亭)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 장창곡 일대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관련 있는 유적이 있는 곳이고, 특히 창림사지 터가 신라 최초의 궁실 터였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창림사지 3층석탑 위치
창림사지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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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사지 당간지주는 창림사지와 아주 가까이 있는 문화재입니다. 함께 보면 좋겠습니다.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慶州 南澗寺址 幢竿支柱, Flagpole Supports at Namgansa Temple Site, Gyeongju)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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