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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의 문화재

경주 분황사(慶州 芬皇寺, Bunhwangsa Temple, Gyeongju)

by happy explorer 2023.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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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는 구황동에 위치한 삼국시대 신라의 사찰로서 사적입니다. 당시 모습을 완벽하게 간직하진 않았지만, 유명한 분황사 모전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분황사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할 뿐 아니라, 여러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에 경주시를 여행한다면, 빼놓지 않고 꼭 방문해야 할 유적지 명소입니다.

 

분황사 전경
분황사 전경

 

분황사의 역사

 

분황사는 선덕여왕 3(634)에 세워진 사찰입니다. 또 모전석탑 역시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신라 탑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분황사 역시 신라의 7곳의 전불시의 가람터라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전불 시의 칠처가람은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암사를 말합니다. 또한 신라의 대표적인 화가인 솔거가 분황사의 관음보살을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장스님과 원효스님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도 남아있고, 고려시대에는 화쟁국사비가 세워졌습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화를 당해 옛 모습이 사라지고, 광해군 때 약사여래입상을 조성했습니다. 또 분황사의 다른 이름으로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합니다.

 

 

분황사의 문화재

분황사에는 볼거리가 매우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분황사 모전석탑, 보광전, 그리고 보광전 내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분황사 석정, 분황사 당간지주 등이 있습니다.

 

 

경주분황사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Stone Brick Pagoda of Bunhwangsa Temple, Gyeongju)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탑은 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서 석탑, 전탑, 목탑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전석탑은 전탑을 만들되, ()으로 쌓지 않고, 석재를 전처럼 가공하여 전돌로 만든 탑을 말합니다. 불교의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식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높이 약 9.3m3층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 기록에는 9층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입니다. 기단부 한 변의 길이는 약 13m, 높이는 약 1m이고, 네 모서리에 석사자상을 배치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모전석탑의 재료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멀리서 구할 수 있는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전돌로 사용했습니다. 1층 탑신석 4면에는 여닫이 문을 만들어 감실(龕室)을 설치했고, 그 양 쪽에 탑을 호위하는 듯한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현재와 같이 수리되었는데, 탑 내부에서 사리함과 각종 공양구 등이 발견되었는데, 옥류, 패류, 금은제 바늘, 가위 등이 함께 나왔고, 숭녕통보와 상평오수와 같은 옛 동전이 함께 나와 탑의 수리 시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감실과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 감실과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 사자상
분황사 모전석탑 사자상
분황사 모전석탑 안내문
분황사 모전석탑 안내문

 

분황사화쟁국사비부 (芬皇寺和諍國師碑趺)

분황사화쟁국사비부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입니다. 분황사 내부의 우물 주변에 놓여 있습니다.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로서 비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비부는 장방형으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려 숙종 때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려 명종대(11701197)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이후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고 하는데, 비는 임진왜란 이후까지도 보존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 있습니다.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안내문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안내문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 Stone Well of Bunhwangsa)

분황사 석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입니다. 우물의 형태는 높이가 약 70cm이고, 상부는 팔각형입니다. 이 우물은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립니다. 호국용변어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데,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 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에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고 해서 호국용변어정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 우물에 많은 석조불의 목을 잘라 넣어 두었기 때문에 이후 모두 발견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정 안내문
분황사 석정 안내문

 

분황사 보광전(芬皇寺 普光殿)

분황사 보광전은 주심포 건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 3, 측면 2칸의 불전입니다. 1998년 보광전을 수리공사했는데, 해체한 부재 중에서 중도리와 종도리에서 확인된 보광전 중창과 중수 내용을 기록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1608(광해군 원년) 보광전(普光殿) 등의 전각을 중창하고,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주조,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680(숙종 6년)에는 허물어져 가던 보광전을 중수하였으며, 상량문은 이때 작성한 것입니다.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芬皇寺 金銅藥師如來立像)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보물입니다. 755(경덕왕 14) 분황사의 금동약사불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06700근이고, 장인은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라고 하였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후 위의 상량문과 중창문을 통해서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17세기에 만들어진 불상이고, 높이가 354cm 이르는 거불이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분황사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는 분황사 내부와 외부에 이르는 넓은 면적에 대하여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사결과 창건 당시 신라 최초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 후 세 번의 중건을 거쳐 광해군 원년(1609)에 현재의 금당인 보광전을 조성하여 지금과 같은 가람배치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는 매우 특이한 예이고, 현재 지표면에 당시의 금당지 구역을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지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의 위치

분황사는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하는데, 바로 분황사 남쪽에 황룡사지가 있습니다. 분황사의 위치는 아래에 링크해 놨습니다. 참고로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http://kko.to/G1gwYoq1oz

 

분황사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map.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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